Fake IDOL :: [한국예술] 민속극 걸립패 미술 방학숙제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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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여름방학 숙제 뽀개기를 포스팅합니다~

한국예술 민속극 걸필패 미술 방학숙제 뽀개기 갑니다.

 

정의

쌀이나 돈을 걷기 위해 풍물을 치며 돌아다니던 집단.

역사

걸립패乞粒牌는 쌀이나 돈과 같은 재물을 걷기 위해 풍물을 치며 돌아다니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러한 걸립패의 유래는 멀리로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리나라의 걸립에는매구魅驅[埋鬼, 埋怪]’, ‘지신밟기’, ‘마당밟기등이라 불린 정초正初 걸립이 가장 중요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 부여夫餘 은력殷曆 정월에 영고迎鼓라는 국중대회國中大會 행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 민족에게는 정월에 일정한 종교적 행사를 갖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꽹과리, , 북 등의 타악기들을 치고 대포수, 양반, 각시 등과 같은 풍물의 잡색들도 갖춘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걸립패는 고려시대 중국의 나례가 들어온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나례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에 방상시方相氏, 진자侲子, 12 등의 나례신들을 앞세우고 타악기들을 두들기며 잡귀잡신을 쫓는 일종의 송구영신送舊迎新 의례였다. 이러한 섣달그믐의 나례에서 정초의매구’, ‘지신밟기’, ‘마당밟기등이라 불린 우리나라의 정초 집돌이 풍물, 곧 정초 걸립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인 1040(정종 6)에 이미 중국의 나례가 궁궐에 들어와 있었다. 1296(충렬왕 21)에는민간의 나례를 금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 말 원천석元天錫 강원도 원주에서 행한 민간 나례들을 한시漢詩 다루고 있다. 이렇게 강원도 원주에서도 민간 나례가 행해진 것은 고려 전기에 궁궐에 들어온 나례가 고려 말에는 지방관아들을 통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고려는 983(성종 2)에 전국에 12 두고 중앙에서 관리들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완성하게 된다. 중앙집권 체제하에서는 지방관아의 업무가 규모만 작을 뿐 중앙 정부와 비슷했고, 전국의 각 지방관아들에서 하는 일들도 거의 동일했다. 그러므로 고려 말에 강원도 원주에서까지 민간나례가 행해졌다면, 적어도 고려 말에는 전국의 지방관아들에서 매년 나례가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나례는 잡귀잡신을 쫓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군례軍禮였고, 타악기들을 두들기는 것이기에 악공 계통의 사람들이 이를 담당했다. 고려시대에 궁궐에서는 고각군鼓角軍 수행했다고 한다. 지방관아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람들, 곧 악공의 광대의 역을 이른바 광대 집단 사람들이 맡아 한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대체로 전국의 관아들에서 연말 나례를 한 광대 집단 사람들은 정초가 되면 민간의 집들을 돌며 지방 관아에서의 나례와 비슷한 행위들을 했다. 우리 민족은 정초가 되면 일정한 종교적 마음을 갖기에, 정초에 어떤 사람들이 찾아와서 나름의 일정한 종교적 행위를 하면 쌀과 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광대들은 그러한 정초 민간에서의 행위를매구라 했다. ‘잡귀를 몰아낸다는 뜻의매구나례와 거의 같은 말이다. , ‘걸립乞粒이라고도 했다. 광대들의 입장으로는 종교적인 것은 둘째이고 사실상 그러한 행위를 통해 쌀과 돈을 거두러 다니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초 민간에서의 광대들의 매구나 걸립 혹은 그러한 광대들의 행위를 흉내 낸 일반인들의 매구나 걸립은 적어도 조선 전기에는 이뤄졌다. 류희춘柳希春 『미암일기眉巖日記』에매구로써 곡식을 얻는 사람(1576. 1. 20.)’이란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광대들의 정초 매구패는 부자 마을이나 부잣집들만 찾아다녔기에, 논농사를 짓는 마을에서는 광대들의 매구를 흉내 내어 마을 단위의 매구패를 만들어 마을의 집들을 두루 다니며 매구를 치기도 했다. 논농사 지역의 마을들에서는 김매기나 모심기 때 두레 농악을 쳤기에, 그러한 두레 농악을 조금 더 갖추면 매구 풍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에 의한 마을 단위의 정초 매구는 대개 정월에 있는 동제洞祭 제물祭物 마련을 위한 걸립으로도 많이 이뤄졌다. 농민들에 의한 정초 매구는 광대들의 매구에서처럼 잡색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두레 농악 자체에는 원래 잡색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나례신들은 주나라 이래 방상시, 진자, 12신 등이었으나, 송나라(9601279)에 와서는 이들이 지군指軍, 판관判官, 조왕신竈王神, 소매小梅(젊은 여자) 등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수용하여 조선 전기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나례신들로 종래의 방상시, 진자, 12신 외에도 이러한 지군, 판관, 조왕신, 소매 등이 더 나오고 있다. 이러한 나례신들은 모두 가면을 썼다. 그래서 중국의 나례신들에 대한 신앙심이 별로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나례 행사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중심이 되면 탈놀이와 비슷한 것이 되기도 하고, 타악기를 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면 정초 집돌이 풍물과 비슷한 것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정초 민간에서 이뤄진 광대들의 매구에서는 이들 나례신들이 포수, 양반, 각시 등과 같은 풍물의 잡색들이 되고 만다.

조선 후기가 되면 절걸립패가 성립한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승병僧兵으로 참가했기에, 이후 국가로부터 일정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사찰들이 왜병에 의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은 사찰을 재건하거나 중수重修하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하거나 전문 풍물잽이들을 고용하여 절걸립을 많이들 했다.

내용

걸립은 고려 이래 대체로 전국의 지방관아에서 매년 치러졌던 나례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정초 광대들에 의한 민간에서의 매구와 상당 부분 연관이 있다. ‘매구’, ‘지신밟기’, ‘마당밟기라 하여 해당 집의 마당, 부엌, 대청, 안방, 장돗대, 뒷간, 우물, 마굿간, 대문 등을 두루 다니며 주술적呪術的이거나 축원적인 말과 함께 풍물을 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집의 성주신이 있는 대청에 쌀, , , 촛불 등을 놓고 성주고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그 집의 최고신인 성주신에게 한 해 그 집의 제액초복除厄招福 빌며 성주고사소리를 부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이러한 성주고사 의례는 지방관아의 나례 때는 없었던 것으로, 광대들이 정초에 민간을 돌며 걸립을 할 때 생겨나 정착된 것이다. 애초에 걸립을 목적으로 정초보다 봄가을에 주로 다녔던 조선 후기의 절 걸립패는 풍물보다 이러한 성주고사소리를 더욱 중시하여 이후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걸립의 종류에는 광대들의신청神廳걸립’, ‘걸립’, ‘낭걸립’, 일반인들의낭걸립’, 승려 계통 사람들에 의한절걸립등이 있었다. 이 중 신청걸립은 경기 이남의 광대들인 세습무世襲巫 집안의 남자들인 화랑이 집단 사람들이 무부청, 화랑청, 재인청, 광대청이라고도 불린 신청을 중심으로 걸립을 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영걸립은 광대들이이라고 쓴 간단한 영기들을 들고 걸립을 한 데서 나온 것이며, 낭걸립은 한 지역이나 마을의 신인 서낭신이 내린 기를 앞세우고 걸립을 한 데서 나온 것이다. 걸립은 또한 그 목적에 따라 다리걸립, 절걸립, 서당걸립, 학교걸립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소방서에 필요한 장비들을 갖추기 위한 소방서걸립이 한때 많았었다.

특징 및 의의

이렇듯 그 유래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 전기에는 분명히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걸립은 우리나라 풍물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풍물의 잡색놀이도 포함하고 있기에, 걸립은 탈놀이에 있어서도 중요한 한 부분이다.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광대들의 신청神廳 풍물인 전남 영광농악에는 지역의 다른 풍물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포수, 참봉, 양반, 조리중, 할미, 각시, 좌창부, 우창부, 홍작삼, 초롱이 등 다양한 잡색들이 있다. 이들 잡색들은 모두 나무로 된 가면을 쓰고 전통 가면극에 비견될 수 있는 여러 탈놀이를 하고 있다. 이는 걸립패의 활동이 풍물에만 머물지 않고 탈놀이와도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때 풍물 잡색의 양반을 우리 고유의 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아 이러한 잡색놀이에서 우리나라의 탈놀이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탈놀이의농악대굿 기원설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중국에서 들어온 나례, 그중에서도 지방 관아의 나례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이뤄져 이 학설은 수정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농악대굿 기원설에서 우리 고유의 신으로 설정한 농악 잡색의양반이중국 나례의판관같은 것에서 나와 이뤄진 인물로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농악대굿 기원설에서는 양반 외의 잡색들 곧 각시니 포수니 같은 것들은 양반과의 관계 설정을 통해서 2차적으로 성립된 존재들이기에, ‘양반자체가 고유의 신격이 될 수 없다면 이들도 더 이상 우리나라 고유의 신들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농악대굿 기원설에서 설정한 농악은 사실상 그 연대가 많이 올라갈 수 없다. 사실상 중국의 나례가 들어온 이후에나 해당하는 농악인 것이다.

참고문헌

농악(정병호, 열화당, 1986), 신대농기(이보형, 한국문화인류학8, 한국문화인류학회, 1976), 전남 남해안지역 절걸립패의 활동 및 성격 고찰(송기태, 남도민속연구13, 남도민속학회, 2006), 정초 집돌이농악과 지방관아 나례희의 관련 양상(손태도, 한국음악사학보49, 한국음악사학회, 2012), 탈춤의 역사와 원리(조동일, 홍성사, 1979), 호남지역 풍물굿의 잡색놀음 연구(이영배,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http://folkency.nfm.go.kr/kr/topic/%EA%B1%B8%EB%A6%BD%ED%8C%A8/1240

 

Posted by Users FAKE ID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