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IDOL :: [한국예술] 민속극 가면극 강릉 관노 가면극 방학숙제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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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숙제 뽀개기

가즈아~

미술 방학숙제를 이렇게 뽀개면 되요~

강릉 관노 가면극 가시죠~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매년 단오제 때 행하던 조선시대 관노들의 가면극.

 

역사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許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幷書」에 “계묘년(1603년, 선조 36)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에게 들으니 이렇게 말했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중략)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幡蓋와 향화香花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부사溟州府司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잡희雜戲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드립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지금부터 약 4백 년 전에 이미 대관령산신을 모시는 강릉 단오제가 벌어졌고, 여기에서 신을 위한 잡희가 베풀어졌다고 허균이 기록한 것을 보면 이것이 강릉 탈놀이의 시원으로 유추된다. 실제로 여러 문헌에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잡희를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1933년 당시 강릉군수였던 다카사와瀧澤誠가 주도하여 강릉고적보존회에서 간행한 『증수 임영지增修臨瀛誌』에는 “5월 5일이 되면 무당들이 각 색의 비단을 모아 고기비늘같이 연이어 오색찬란하게 만들어 장대 끝에 매달아 우산을 드리우듯 해서 화개華蓋라 한다. 힘이 센 사람에게 들려 앞세우면 무당들이 풍악을 울리며 따르고 창우배倡優輩들이 잡희를 하다가 저물어 성남문을 나와 소학천에 이르러 이 놀이를 그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창우배의 잡희는 무당들의 음악과 구별되는 광대의 놀이, 즉 가면극임을 알 수 있다. 창우배는 가면을 쓰고 노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면 강릉 가면극은 허균이 언급한 잡희로부터 출발하여 창우배로, 다시 가면극으로 어휘가 바뀌면서 성격도 점차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허균이 보았던 잡희와 오늘날의 가면극이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기록으로 미루어 17세기 중엽부터 단오제에서 연행되기 시작하여 변화를 거쳐 오늘에 전승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렇게 지속된 것으로 유추되는 강릉가면극이 언제 중단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가면극은 1920년대 아키바 다카시秋葉隆가 조사할 당시에 중단된 상태였으며, 1966년 임동권의 조사에서도 전승되지 않고 있었다. 심일수沈一洙의 문집 『둔호유고遯湖遺稿』에는 1909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무격희가 폐지된 것으로 적혀 있고, 아키바 다카시는 1894년 갑오개혁 이래 끊어지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승이 중단된 강릉 관노 가면극은 1960년대 임동권이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면서 복원이 시작되었다. 임동권은 1960년 7월 24일에 1차 답사를 하였으며 1964년에 2차 답사, 1966년 6월 20일에 3차 답사를 실시하였는데 6월 22일 저녁 가면극의 존재에 대한 확증을 잡고 6월 23일 대한여관에서 녹음을 실시했다. 당시 교육위원회 직원과 제보자인 차형원, 김동하, 장대연, 최재분(무가 제공), 홍재옥(<오독떼기> 제공), 최인수(집례를 맡은 사람), 우동식, 함종태, 방정자, 최돈순, 입암동 박씨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동하는 21세, 차형원은 17세에 강릉 단오제 공연 때 강릉 관노 가면극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장대연은 18세 때 그 춤을 본 것으로 기억하였다. 이러한 언급을 상고해 보면 1966년 당시로부터 이미 62년 내지 63년 전에 강릉 관노 가면극이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동권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967년 7월 20일 4차 답사를 하면서 가면극에 쓰던 가면을 재현하여 제작하였는데, 최상수가 당시 강릉여고에 보관 중이었던 가면을 인수하였고, 함종태의 조언과 김동하, 차형원의 고증에 따라 당시 중앙대학교 조각과 교수로 재직하던 윤영자가 석고로 가면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 김동하, 차형원은 강릉여고에서 보관 중인 가면이 원형에서 거리가 멀다고 하였으나 임동권의 언급에 의하면 새로 석고로 만든 것을 보고 “그만하면 쓰고 놀 수 있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최상수는 이 가면에 대해 “그런데 최근에 와서 새로 만든 가면을 보면, 양반은 우리나라 사람의 골격도 아니고 우리나라 딴 지방 양반가면에서 볼 수 있는 모양도 아니고 일본 가면에 보이는 귀공자의 얼굴을 본뜬 것 같아, 적합한 것이 못되고, 소매각시 또한 일본의 ‘히메[妃] 가면’ 같아 적합지 않다고 본다. 새로 만든 이 가면의 모양을 보면, 하나도 우리나라 사람 같지가 않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강릉 가면극은 주로 음력 5월 5일 단오 무렵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966년의 문화재지정조사고보고서에 의하면 음력 5월 1일 본제가 시작될 때 화개를 만들고 이때부터 연희가 이루어져 4일과 5일에 걸쳐 이어졌다 한다. 아키바 다카시의 조사에도 5월 1일 본제 때부터 화개를 꾸미고 가면극을 했는데 화개는 부사청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가면극은 4일날 대성황사 앞에서 놀고 5일까지 계속했다고 한다.

장소는 12신을 모셨던 대성황사를 비롯한 강릉 지역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연행을 하였는데, 음력 5월 5일에는 오전 대성황사 앞에서 먼저 행하고 다음에는 화개를 받들고 약국성황당─제관청─여성황당의 순으로 순례하며 탈놀이를 했다. 현재는 여성황당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없어졌으므로 남대천 단오터에서 4일간 연행하고 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출전하면서 전승이 부활되었는데 초창기 이 일에 참여한 최상수 씨는 발굴과 재현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음력 5월 5일 강릉에서는 단오굿 때에 주로 관노들의 놀음으로 탈놀음[假面戲]이 있었으니 이조 말 경술국치 되던 해까지 연출되었었다. (중략) 탈놀음은 하나의 여흥으로서 주로 강릉부에 소속되어 있는 관노官奴들이 5월 5일 날 사창社倉 앞 넓은 광장에서 얼굴에 탈을 쓰고 또 가장을 하여 한바탕 놀음을 노는데 오전 11시경부터 저녁때까지 행한다. 이때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수수댁, 소무小巫각시, 양반, 장자말이 나와 번갈아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약간의 재담才談이 있으나 주로 춤이 위주이다.

최씨는 이 탈놀음에 대해서 대부분의 강릉 지역 사람들도 그러한 탈놀음이 자기네 고장에 있었던 것조차도 아는 이가 거의 없고 다만 나이 많은 몇몇의 노인들만이 소년 시절에 보았다는 이가 있을 뿐이었다고 회상하였다. 최상수는 김도수, 김돌이, 김동하 등을 조사하였는데 이들의 말을 참고하여 서울에서 조각하는 사람에게 위촉하여 가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시시딱떽이는 방상시方相氏 가면을 쓰고 나왔다 해서 방상시 가면과 같이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과 같이 강릉탈의 면모를 구체화시키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등장인물로 ‘시시딱떽이(수수댁)•소매小梅각시•양반•장자말이’라 했는데 그 이전 1928년 아키바 다카시의 조사에는 ‘양반광대兩班廣大•소무각시少巫閣氏•시시딱딱이•장자말이’로 기록되었고 『조선총독부 생활상태조사보고서─강릉군』(1930)에 “양반광대는 창우倡優로서 얼굴에 찰札(나무를 가지고 사람 상을 만들어 분장하여 장식하는 것)을 걸고, 머리에는 꿩 깃을 만든 뿔 모양의 관을 쓰고, 손에는 큰 그림부채를 쥐며, 몸에는 보통과 다른 옷을 입고, 무용 등을 한다. 소매각시는 창녀倡女로서 찰, 부채, 복장은 전자와 약간 달라도 춤은 같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강릉 관노 가면극은 1965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1966년 문화재지정자료보고서가 작성되고 1967년 1월 16일 강릉 단오제의 한 종목으로 가면극이 인정되어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면서 확고한 전승 체계를 갖추었다. 강릉시 유천동 주민 가운데 1993년 8월 2일 기예능 보유자로 작고한 권영하가 지정되었으며, 뒤이어 2000년 7월 27일 김종군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주영건, 안병현이 조교로 지정되었다. 앞서 여러 단체에서 사용한 탈이 상이하고 놀이 내용상 문제점이 발견됨에 따라 현재는 김동하•차형원이 제보한 고증과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탈과 놀이를 복원하여 전수하고 있다.

 

내용

 

 

여러 조사 보고서에 강릉 관노 가면극은 무언극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거나 약간의 재담만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차형원은 재담에 대해 “그 재담이라는 거는 서루 말을 통하는 거 보담도 그 탈을 씨고 앉아서 서로 찝쩍거립니다. 가서 이렇게 서로 댕기고, 이래 서로 보고 이래.”라고 말하여 이 가면극이 무언극임을 확실히 하였다. 이렇게 대사가 없다 보니 효과적인 몸짓 언어가 동원되었다. 탈놀이의 반주 음악은 비교적 소상한 고증이 남아 있는데 날라리, 장구, 꽹과리, 징 등을 오음육률에 따라 쳤다고 하였다.

등장인물은 모두 개성이 강하게 표출되는데 강릉 관노 가면극에는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두 명, 장자마리 두 명으로 총 여섯 명이 등장한다. 먼저 양반광대는 호색 풍자나 어리석음을 희화화戲畵化하기 위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특히 강릉 관노 가면극의 양반광대는 가면의 모양이 다른 가면극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아키바 다카시의 조사에서는 호랑이 수염이 달린 가면에 긴 뿔이 있는 관을 쓴다고 하였고 『조선총독부 생활상태조사보고서』에도 머리에는 꿩 깃으로 만든 뿔 모양의 관을 쓴다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차형원은 양반광대가 정자관을 썼다고도 하나 여러 고증에 뿔 모양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나장羅將이 쓰던 깔때기 전건戰巾이었거나 고구려인이 썼던 절풍건일 가능성이 크다. 『증수 임영지』는 나장의 전건을 소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양반광대의 이러한 깔때기 관은 중국 귀주 산간 지방의 나례儺禮에서 양반광대의 것과 동형의 흑백 고깔을 쓰고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양반광대 역시 나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그러한 추정은 소매각시의 어원에 이르면 더욱 긴밀해진다.

소매각시는 양반의 호색을 풍자하기 위한 상대역이다. 소매각시에 대해 오해는 소무각시라고 기록한 아키바 다카시의 강릉 단오제 보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소매각시를 무녀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키바 다카시는 소무각시少巫閣氏라고 표제어로 썼지만 괄호 안에 영어로 ‘Somai(소매)’라고 적어 놓는 치밀함을 보여 주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도 ‘소매’라는 인물이 나오며,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소매는 역시 옛 미녀 이름이다.小梅亦古之美女名”라는 내용과 “각씨는 우리말로 여자이다.閣氏者東語女子也”라는 내용이 전한다. 따라서 강릉 관노 가면극의 소매각시가 나례의 의식에 나오는 소매小妹, 小梅를 차용한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다음에 시시딱딱이는 수수댁, 시시딱떽이, 시시딱대기, 시시닦덕기, 수수딱때기 등으로도 불리는데 어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아키바 다카시의 조사에는 방상시의 가면과 같은 무서운 목제 가면을 쓴 것으로 나타나고 다른 제보자의 증언에서도 방상시가 언급되고 있고, 그가 ‘쉬시 쉬시’ 하면서 등장한다는 것과 딱딱이패가 놀이패를 말하므로 ‘시시’라는 축귀어에 ‘딱딱이’가 합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인물은 벽사를 하는 기능을 가지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뜻에 잡귀를 쫓기 위해 오방색 탈을 쓰고 방망이 또는 황토를 칠한 칼을 들고 나타난다.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가 작성한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서도 강릉 지방의 ‘오광대놀이’라고 소개하면서 ‘목제 인형을 만들어 노는 것이 전염병 예방을 위한 것’이라 언급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단오 무렵 질병을 구축하기 위한 나례적儺禮的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장자마리는 장자말, 장재말이라고도 하는데 양반을 뜻하는 장자長者의 하인인 마름이 합성된 것으로 유추된다. 양반광대를 해학적으로 만들며 놀이를 희극화하는 인물로 회청색 포대를 뒤집어쓰고 불룩한 배를 만들어 이것을 돌리면서 무대를 넓히고 관중을 웃긴다. 옷의 색깔은 땅과 바다를 연상케 하고 표면에는 곡식의 줄기인 나리나 해초인 말치 등을 매달고 나와 풍농어를 기원한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포대가면은 하회 별신굿놀이의 주지, 통영 오광대의 중광대처럼 신앙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일본 오키나와의 신격 가면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따라서 강릉 관노 가면극의 등장인물은 명칭이나 형태에서 나례의 기능인 벽사진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러한 신앙적 기능은 탈놀이의 원초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제보에 따르면 장자마리의 춤사위는 이른바 ‘마당딱이춤’이다. ‘마당을 닦듯이 추는 춤’이라는 뜻인데 매우 독특하다. 이와 함께 도리깨춤을 춘다. 배불뚝이 모습으로 도리깨를 쳐내듯이 마당을 넓게 하는 의도로 추는 춤이다. 차형원의 언급대로 “장자마리가 맨 먼저 나와서 그 참 마당땍이야. 전부 그 노는 장소를 한 번 멀리도 맨들어 놓고 좁으면 저리 좀 피해라고 사방 이렇게 물려서 널찍하게 이렇게 맹글어 놓고…… 그거는 보통 그 참 누구 말마따나 마댕이, 그전 옛날 마댕이 할 때 도리깨 쳐내듯이”라고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춤사위로 고증에는 점잖게 추는 맞춤과 어깨춤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경도잡지』에 “춤은 반드시 대무인데 남자는 소매를 펄럭이고 여자는 손을 뒤집는다.”라는 표현과 일치한다. 차형원은 “나가서 우선 발 드는 것이 저짝 여자는 왼짝을 듭니다. 남자는 가서 인제 오른짝을 들고 나갑니다. 인제 서로 좌우에 갈라서서 서로 춤을 추고 걸음걸이도 함부덤 안 걸었습니다. 아주 이렇게 자욱을 곱게 이렇게 참 떼어놓으며 춤을 추고 이렇게 딱 마주합니다. 해 가지고는 서로 돌아가고…….”라고 춤사위에 대해 증언하였다.

시시딱딱이 춤사위는 가면극의 상징성을 잘 보여 주는데 무서운 채색탈을 쓰고 칼을 휘둘러 재앙을 쫓는 칼춤과 사랑 놀음을 훼방하는 제개는춤과 소매각시를 유혹하는 너울질춤을 춘다. 차형원은 이 춤에 대해 “아, 그 험한 탈을 쓰고 거기 가서 인제 가꾸 제갭니다. 이리두 찝쩍, 저리두 찝쩍.” 한다고 했으며, 김동하는 “벌건 저 버드낭그로써 깎아서 뻘건 칠을 해서 지레기 요만큼 해서 들었지요. 그 속에서 들고 있다가 그저 이렇게 휘두르고 추고 이러니 그 칼이 가끔 불쑥불쑥 나오더구만요.”라고 제보하였다.

강릉 관노 가면극의 놀이마당을 분류하면 대체로 다섯 마당으로 가를 수 있다. 첫째로 장자마리 개시, 둘째로 양반광대•소매각시 사랑, 셋째로 시시딱딱이 훼방, 넷째로 소매각시 자살 소동, 다섯째로 양반광대•소매각시 화해 과장이다.

첫째 마당은 탈놀이 시작과 함께 먼저 포대자루와 같은 포가면을 전신에 쓴 두 명의 장자마리가 연희를 개시한다. 요란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불룩한 배를 내밀면서 놀이마당을 넓히기 위해 빙빙 돌아다닌다. 관중을 희롱하기도 하고 선 사람을 앉히기도 하며 성행위를 모의한 춤도 춘다. 옷의 표면에는 말치나 나리 등 해초나 곡식을 매달고 속에는 둥근 대나무를 넣어 불룩하다. 장자마리는 희극적인 시작을 유도하며 마당을 정리하고 해학적인 춤을 춘다.

둘째 마당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가 양쪽에서 등장한다. 양반광대는 뾰족한 고깔을 쓰고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고 위엄있게 등장하여 소매각시에게 먼저 사랑을 구한다. 소매각시는 얌전한 탈을 쓰고 노랑 저고리 분홍치마를 입고 수줍은 모습으로 춤을 추며 양반광대와 서로 뜻이 맞아 어깨를 끼고 장내를 돌아다니며 사랑을 나눈다.

셋째 마당은 시시딱딱이가 무서운 형상의 탈을 쓰고 양쪽에서 호방한 칼춤을 추며 뛰어 나온다.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에 질투를 하며 훼방을 놓기로 모의하고 때로는 밀고 잡아당기며 훼방하다가 둘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시시딱딱이는 무서운 벽사가면을 쓰고 작은 칼을 휘두르며 춤춘다.

넷째 마당은 시시딱딱이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 사이를 갈라 한쪽에서는 양반광대와 놀고 다른 편에서 소매각시를 희롱하며 함께 춤추기를 권하나 완강히 거부한다. 이를 본 양반광대는 크게 노하며 애태우나 어쩔 수 없이 분통해하다가 시시딱딱이를 밀치고 나와 소매각시를 끌고 온다. 소매각시가 잘못을 빌어도 양반광대가 질책하니 소매각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다는 구실로 양반광대의 긴 수염에 목을 매려고 한다. 수염에 목을 매어 죽으려는 소매각시의 결백 호소에 놀란 양반광대는 놀라고 측은한 생각으로 소매각시를 용서한다. 수염으로 목을 감는 모습은 해학적이며 권위의 상징인 수염을 당기어 결백을 오히려 시인케 하는 내용은 죽음의식을 초월한 희극화된 표현이다.

다섯째 마당은 수염을 목에 감고 자살을 기도하여 결백을 증명하려 했던 소매각시의 의도대로 양반광대의 관용과 해학으로 인하여 서로 오해가 풀리고 결백이 증명되므로 탈놀이가 흥겨운 화해와 공동체 마당으로 끝을 맺는다. 악사들과 괫대(깃대), 구경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극이 마무리된다.

 

특징 및 의의

 

강릉 관노 가면극은 음력 5월 5일 개최되는 강릉 단오제에서 국사성황신을 모신 가운데 행해진 신성제의극의 성격을 지닌 성황신제탈놀이 계통의 가면극이다. 국내 유일의 무언극으로 대사가 없이 춤과 동작만으로 진행되며, 강릉부에 소속된 관노들에 의해 연희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관노들이 단오제 행사에 참가하였던 것은 제관 중에 삼헌관으로 관노가 있었고 관노가 맨 앞에서 태평소를 불며 일행을 이끌었던 것을 보아도 관노들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양반광대의 풍자를 해학적으로 이끌며 소매각시의 정절관을 부각시켰으며, 벽사적 기능을 하는 시시딱딱이를 통하여 재앙을 쫓고 장자마리를 통해서 풍요를 기원한 제화초복除禍招福의 강릉 지역 민속연희라고 할 수 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안동 하회 별신굿 탈놀이와 함께 우리나라 성황신제 탈놀이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강릉관노가면극 연구(장정룡, 집문당, 1989), 강릉단오제 중요무형문화재지정자료(임동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6), 강릉단오제 현장론 탐구(장정룡, 국학자료원, 2007), 산대•성황신제가면극의 연구(최상수, 성문각, 1985), 서낭굿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91).

http://folkency.nfm.go.kr/kr/topic/%EA%B0%95%EB%A6%89%EA%B4%80%EB%85%B8%EA%B0%80%EB%A9%B4%EA%B7%B9/1235

Posted by Users FAKE ID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