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IDOL :: [한국예술]민속극 가면극 가산 오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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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포스팅은 가산 오광대에대해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정의~

 

경상남도 사천 축동면 가산리에서 전승되는 탈놀음입니다.

 

역사는?

 

가산에서 오광대가 언제부터 연행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지리적으로 가산리는 남강南江과 사천만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구전에 의하면 남강으로 상자가 떠내려 와 마을 사람들이 열어 보니 그 안에 과 연기 기재, 각본 및 의상이 있었고, 그 각본을 당시 서울에서 귀양 온 양반에게 물어 오광대를 놀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경상도의 밤마리 오광대나 김해 오광대가 연행되었던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이것은 탈춤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사실(fact)이라기보다는 그 기원을 둘러싼 일종의 주지主旨(motif)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만 1974년 조사 당시 연희자들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연희자 한순녀韓順汝(1853∼1936)의 생존 시기와 활동 연대를 고려할 때 이미 19세기 후반에는 탈춤이 가산마을에 정기적으로 연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유랑하는 전문연희집단이 아닌 지역민들에 의한 탈춤 연행이 경상남도 각 지역으로 확산•정착하였다고 추정되는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송석하宋錫夏가 경남 일원 탈춤의 전파 경로를 거론한 바 있으나, 가산 오광대駕山五廣大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전파론은 종종 경남 일원의 탈춤의 역사를 설명하는 중요 근거로서 인용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것은 19세기 후반 가산을 비롯한 경남 연안 지역에 왜 탈춤 연행이 급속하게 확산되어 정착하였고 나아가 지역민들이 어떻게 주도했는지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가산 오광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점에서 가산의 지리적 환경 및 오광대 연행을 주도한 부류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탈춤 연행의 역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에 가산마을은 진주목에 속한 포구 마을로 남강과 사천만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이 같은 지정학적 위상으로 인하여 1760년에 경남 지역의 세 조창 가운데 하나인 우조창右漕倉을 두었다. 이 조창에 인근 8개 마을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보냈다. 이것을 계기로 가산마을에 장시도 들어서고 선주들도 사는 등 크게 번창하여 전성기에는 호구만도 300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같은 사회•경제적 환경은 오광대가 정착•발전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좌조창이 설치된 마산에 오광대가 정착•발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이후 탈춤 연희자들을 계속해서 배출하여 온 청주 한씨 가문은 바로 이곳 조창의 행정을 담당하여 온 관속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세제도가 바뀜에 따라 가산의 조창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가산마을이 점차 쇠락하자 많은 주민이 외지로 떠났다. 그렇지만 조창 관련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청주 한씨 가문은 계속해서 가산에 세거했으며, 이들은 가산 오광대의 연행이 지속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오광대의 주요 연희자 중 다수가 이들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요컨대 가산 오광대는 조창 관련 행정 업무를 맡으면서 세거하여 온 특정 종족宗族들이 연행을 계속 주도하여 온 것이다. 이 점에서 중국에서 나타나는 종족 연극과 유사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한국 탈춤들에서는 보기 드문 가산 오광대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대를 이어 연행에 종사하여 왔고 심지어 순회공연까지 했으나 이들은 전문연희집단은 아니었고 대보름 등 특정 시기에만 공연했을 뿐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했다.

가산이나 마산과 같이 조창이 설치된 지역 외에도 동래나 고성, 진주와 같은 지역의 읍치邑治에 탈춤이 연행되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외에 통영, 거제, 수영, 부산진 등 군사 기지가 설치된 곳에도 탈춤 연행이 정착하였다. 이들 지역은 모두 관 중심의 질서가 강력하게 작동하였던 곳이다. 나아가 이 지역 탈춤의 중요 연희자들이 이서吏胥를 포함한 관속官屬이나 군인 등이라는 사실도 공통된다. 이것은 황해도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이것은 탈춤이 19세기 후반에 각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정착하는 과정에서 이서나 군인들이 자신의 지역에 경쟁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켰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확산 형태를 지역 간 동등화 상호 작용이라고 한다. 이것은 오광대가 매우 짧은 기간에 경남 일원으로 급속도로 확산된 변화를 지칭하는 데 적합할 것이다.

가산 오광대의 경우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연행의 역사를 보여 주는 문헌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 연희자들의 사회•경제적 위상을 보여 주는 것들이 전승되고 있어 연행의 성격을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산 오광대의 경우 1920년대 전반에는 인근 하동, 남해, 사천 등지에 순회공연을 나선 사실이 중요한 기억으로 전승되어 왔다. 연대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구전에 의하면 순회공연이 가산마을 학교 건립과 운영을 위하여 연행되었다고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는 3•1 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사립학교나 야학을 자발적으로 설립하여 교육의 기회를 사회 저변으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을 때였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 연희자였던 한순녀가 1921년에 가산마을의 유지들과 더불어 야학교 설립과 운영을 주도한 사실을 신문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가산 오광대의 연행이 지역사회의 필요성과 부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이러한 선순환 구조가 일제강점기에 연행이 유지되는 중요 요인이었을 것이다.

 

내용은?

 

탈춤은 각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각 지역 농경세시의 제의와 결합되어 정기적으로 연행되었다. 가산 오광대의 경우 정월대보름에 동제洞祭인 천룡제天龍祭를 치른 후 연행되었다고 생각된다. 당산 수호신의 신격은 관련 문서에 남아 있다. 이곳의 제당은 마산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조창을 경영하던 당시에는 조운의 안녕을 비는 곳이기도 했을 것이다.

1895년에 조운 제도를 폐지하면서 조창이 있던 당산에 외부인들이 묘지를 쓰는 등 당산의 제의는 그 신성성이 훼손되는 위기에 처했다. 그렇지만 탈춤의 연행은 마을의 동제를 배경으로 계속해 왔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을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순회공연을 하는 등 지역 사회의 새로운 기대에 부응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조창을 경영할 때에는 조운에 맞추어 제를 올렸겠지만, 이와 관련된 문헌 자료나 구전은 전해지지 않는다. 가산마을의 당제는 예전에는 정월 초하루 또는 그날이 시時에 맞지 않으면 음력 2월 중 택일하여 자시子時에 제를 올렸다. 이렇게 제를 올리고 나면 초이틀부터 보름날까지 매구굿(풍물놀이)을 하며 동네를 돌았다. 그리고 보름날 밤에 달집을 태우고, 비로소 오광대놀이를 시작했다. 또 이것이 끝나면 부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놀고 어느 때에는 삼월 삼짓날 무렵에 귀향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천룡제가 정월대보름으로 확정되었고 제사 시작 시간도 오전 11시로 변경되면서, 오전에 제사를 마치면 바로 지신밟기를 하고 그날 저녁 달집태우기를 하고 오광대놀이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문화재 지정 이후 초청 공연이 늘어난 것은 분명히 새로운 변화일 것이다.

가산 오광대는 오방신장무, 영노, 문둥이, 양반, 중, 할미영감의 여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과장인 오방신장무 과장은 가산 오광대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무라고 할 수 있다. 첫 과장에 오방신장무가 들어 있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우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오방신장무의 춤사위가 남아 있다. 춤사위는 무게가 무겁고 점잖으며 질서가 잡혀 있다. 제일 먼저 중앙 황제장군이 들어오고, 이어서 동방 청제장군, 남방 적제장군, 서방 백제장군, 북방 흑제장군이 차례로 들어와 춤추며 서로 인사한다. 그리고 동서남북 사제장군들이 중앙의 황제장군에게 일제히 절을 하고, 황제장군은 춤을 추면서 사제장군을 각각 자리에 세우고 모두 함께 춤을 춘다.

둘째 과장인 영노 과장은 영노가 등장하여 앞서 등장한 오방신장을 잡아먹는 내용이다. 영노는 “삐삐∼” 소리를 내며 탈판을 돌아다니다가 청흑백적靑黑白赤 순서로 신장을 잡아먹는다. 잡아먹힌 신장은 차례로 퇴장한다. 그러면 마지막에 황제장군만이 남는다. 황제장군이 영노에게 영노의 정체를 묻는 대화를 여러 번 주고받는다. 마지막으로 황제장군이 자신이 양반인데 양반도 잡아먹느냐고 영노에게 묻는다. 그러면 영노는 양반이 더 맛이 있다고 하면서 황제장군을 잡아먹는다. 그러고 나면 그전에 등장해 있던 포수가 영노와 대치하다가 포수가 쏜 총에 영노가 맞아 죽는다.

셋째 과장인 문둥이 과장에는 입찌그랭이, 코빠진 놈, 눈찌그랭이, 귀빠진 놈, 안팎곱추, 절름발이, 곰배팔이의 겹병신 다섯명이 등장한다. 서로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은 구별하기 어려우며, 병신짓을 하며 덧배기병신춤을 춘다. 춤이 끝나면 도都문둥이가 관객들에게 동냥을 나서며 장타령을 부른다. 나머지 4명의 문둥이는 탈판을 돌며 장타령을 하며 실제 동냥을 한다. 장타령을 마치면 문둥이들은 투전 노름을 하고, 반신불수 어딩이가 나와 문둥이들에게 집적거리며 개평을 달라고 조른다. 문둥이들이 어딩이를 무시하자 어딩이는 순사를 데리고 들어온다. 순사가 나와 노름을 했다며 문둥이들을 잡아가려 하자 문둥이들은 용서해 달라고 애걸을 한다. 순사가 퇴장하면 다시 노름판을 벌인다. 또 다시 어딩이가 개평을 달라 하자 문둥이들이 순사에게 일렀다고 어딩이를 때리고 쫓아낸다. 그러자 어딩이는 다시 순사를 데리고 등장하고 순사가 문둥이들을 잡아간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탈춤 가운데 조선시대의 포졸이 아닌 일제의 순사가 등장하는 것은 가산 오광대가 유일하다. 강용권이 채록한 첫 연희본은 물론, 서강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에서 복원을 위하여 장기간에 걸쳐 조사하고 연희본을 개고할 때에도 모두가 과거의 연행에서 순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1974년에 처음 복원할 때 순사로 재현하여 연행을 했으나, 이후 민족문화의 계승과 보존이라는 담론에 부합하여 다시 조선시대 포졸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은 연희본까지 포졸로 되어 있다. 이렇듯 포졸에서 순사로 다시 포졸로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에 문화적으로 대응하려는 역동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민속 예술의 중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과장인 양반 과장에는 큰양반과 네명의 작은양반이 등장한다. 양반 과장은 여느 탈춤과 마찬가지로 말뚝이가 나와 권위만 내세우는 양반을 망신주고 비판하는 것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다섯째 과장인 중 과장은 다른 지역의 탈춤들과 다른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먼저 소무小巫가 양반의 첩인 서울애기를 서울에서 데려온다. 이때 양반은 무대 한쪽에서 부채를 흔들며 우쭐댄다. 이어 노장老丈이 상좌上佐를 데리고 들어오고, 노장은 서울애기에 반해 그녀를 유혹해서 업고 달아난다. 양반은 말뚝이에게 도망간 서울애기를 찾아오라고 호령한다. 말뚝이는 노장과 상좌, 서울애기를 잡아온다. 양반은 말뚝이에게 노장을 매질하라고 한다. 상좌는 노장 위에 엎드려 말뚝이가 때리는 채를 대신 맞는다. 상좌의 정성에 감복한 양반이 이들을 풀어 주라고 한다. 이때 노장은 상좌에게 절에 돌아갈 노자를 모으라고 하고, 상좌는 동냥을 한다. 그동안 노장은 <농부가> 등과 같은 단가短歌를 부르는데, 보통은 <진농부가>로 끝을 맺는다. 을 부르며 관객과 신명나게 노는 중 과장은 가산 오광대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과장인 할미•영감 과장 역시 다른 탈춤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 준다. 먼저 할미와 아들 마당쇠가 등장하며 재담을 나누는 중 옹생원이 등장한다. 옹생원은 할미와 수작을 한다. 이때 영감이 서울애기와 등장하고, 할미와 영감이 싸움을 벌인다. 영감이 집안의 물건을 깨는 와중에 조상 단지가 깨지면서 까무러친다. 할미는 옹생원을 시켜 봉사를 불러 독경을 하게 한다. 이어 옹생원이 대잡이를 불러 대를 잡는데 영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무당을 불러 진오귀굿을 하게 한다. 이때 다섯 명의 무당이 등장한다. 이렇게 탈놀음이 끝나면 관객들과 연희자들이 어울려 신명나게 춤을 추는 파지굿으로 모든 연행이 마무리된다.

연희에 사용되는 의상은 별도로 제작하지 않고 원래부터 일상생활에서 쓰던 것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타지에서 연행되는 경우에는 연행에 적합한 별도의 의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 경우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연행할 때마다 새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한 탈을 고쳐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탈을 특별히 제작하는 사람은 없고 마을 주민 가운데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연희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하였다고 한다. 서강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 강용권康龍權등이 가산 오광대의 복원을 지원할 당시 민화가 김만희를 데리고 가서 탈을 제작하였으나 마을 주민들이 기억하는 탈들과 차이가 컸다. 그리하여 연희자 한윤영이 직접 제작했는데, 이것이 비교적 호응을 얻어서 그 후 연행하는 탈의 모범이 되었다.

 

특징 및 의의는?

가산 오광대는 의 모양이나 춤사위에서 진주 오광대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진주와 가산은 지리적 거리도 가깝다. 이것을 근거로 가산 오광대가 진주 오광대로부터 전파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원형과 전파의 계보를 강조하는 이러한 지적은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각 지역의 탈춤들 사이에 보이는 비록 작지만 다양한 차이가 갖는 의미와 역동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가산 오광대뿐 아니라 각 지역의 탈춤들이 급속하게 확산하고 정착하는 과정은 단순한 복제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면서 나름의 특성과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

가산 오광대가 진주 오광대와 구별되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영노 과장오방신장무 과장이 분리되지 않고 섞여 있는 것은 진주 오광대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탈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가산 오광대만의 특징적인 부분이다. 또한 영노 탈이 사자 모양과 같아 통영 오광대의 사자무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이색적이다.

두 번째, 일반적으로 진주 오광대를 비롯한 다른 탈춤에서는 할미영감의 싸움에서 할미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보통인데, 가산 오광대는 영감이 조상 단지를 깨서 동티가 나서 죽는 설정으로 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또한 할미와 옹생원의 치정 관계 설정이나 소무와 서울애기의 관계도 다른 탈춤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세 번째, 가산 오광대의 구성에서 오행설五行說이 문화적으로 뚜렷하게 구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산 오광대 연희자들이 오방신장무 과장과 영노 과장을 통합된 과장으로 인식하여 다섯 과장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할미•영감 과장에 다섯 무당이 등장하며, 오방신장무 과장의 다섯 신장, 문둥이 과장의 다섯 문둥이, 양반 과장의 다섯 양반에서도 오행설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가산 오광대와 진주 오광대의 연희자들의 사회적 위상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진주 오광대의 연희자들은 진주 읍치에 거주하는 천민 중심의 전문 유희 집단 출신이었다. 반면 가산 오광대의 연희자들은 조창에서 근무한 관속 출신이 주류였다는 점이다. 특히 가산의 경우 청주 한씨 출신의 연희자들이 배출되는 시기가 이들이 유교적 틀에 맞추어 종족을 형성하는 시기와 겹친다는 점도 진주 오광대의 연희자들은 물론, 다른 지역의 탈춤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연행의 정착과 관련하여 양자의 선후 관계를 분명하게 상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까운 지역에 양자가 전승되어 왔다는 점에서 오히려 양자의 절충 관계를 상정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울 것 같다. 이와 함께 중요한 사실은 이렇듯 사회적 배경에서 큰 차이가 있는 부류들이 같은 양식의 민속예술을 습득하여 향유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가까운 지역에 두 종의 오광대가 전승되어 온 진주 지역의 사례는 19세기 후반 탈춤이 특정 계급의 경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계급의 연희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문화 예술 양식으로 점차 확산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탈춤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가산 오광대의 예를 들어 다른 지역의 탈춤 등과 같이 천민이나 평민, 또는 상인 등이 연희한 다른 사례를 무시하거나 탈춤에 민중 문화의 성격이 내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탈춤에는 단지 ‘민중’이라는 특정 계급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급이 참여하고 향유하는 일종의 복합 문화, 즉 ‘포퓰러 문화(popular culture)’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탈춤을 포퓰러 문화로 인식하는 것은 ‘기원’과 ‘민중’이라는 민속 담론이 갖고 있는 지적 곤경에서 벗어나 19세기 후반의 새로운 사회 문화적 역동성을 포착하고 비교사적 맥락에서 대화와 논의의 폭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은?

19세기 후반 향리 출신 노년 연령집단과 읍치의 제의 그리고 포퓰러 문화의 확산(이훈상, 민속학연구27, 국립민속박물관, 2010), 가산 오광대(이훈상, 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경상남도 사천의 가산 오광대와 고성의 고성 오광대 그리고 이들의 연희자들과 고문서(이훈상,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한국학연구소, 2015), 역사의 신화를 부수는 힘겨운 여정(이훈상, 한국사 시민강좌26, 일조각, 2000),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문화재청(cha.go.kr).

http://folkency.nfm.go.kr/kr/topic/%EA%B0%80%EC%82%B0%EC%98%A4%EA%B4%91%EB%8C%80/1231

 

 

 

Posted by Users FAKE IDOL